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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동차 안전 법규] NHTSA는 왜 '자기 인증' 제도를 채택했나?

21c형Pilot 2021. 1. 31. 11:51

미국의 자동차 법규는 크게 환경 법규와 안전 법규로 나뉘게 됩니다. 환경 법규는 차량에서 나오는 배출가스에 대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차량의 연비는 배출가스량을 기반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연비 역시 환경 법규 범주에 포함됩니다. 반면, 안전 법규는 그 외 나머지 것들을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돌 및 충격 안전성 등과 같이 사고가 발생한 이후 차량이 얼마나 안전하게 버티는지를 보는 규정(Crashworthiness) 그리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설계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하는 규정(Crashavoidance) 등으로 구성이 됩니다.

연방 환경 법규를 담당하는 당국은 EPA(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인데 특이하게도 미국에 판매되는 차량은 EPA 법규 말고도 CARB(California Air Resources Board)라는 규제 당국에서 만든 캘리포니아 법규도 만족해야합니다. 자동차 제조사는 EPA와 CARB의 법규를 정확히 만족했는지를 단계적으로 검증받게 됩니다. 테슬라 소식을 유심히 지켜봐온 분들은 지난 해 모델 S 롱 레인지 플러스가 AER 400마일을 인증 목표로 했으나 EPA 시험에서 391마일에 그치자, 이의 제기를 통해 재시험을 했고 결국 402마일을 기록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신 적 있을 겁니다. 이렇듯 EPA는 환경 법규를 기업이 정확히 만족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차량을 직접 평가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해당 차종의 인증을 완료해주어 차량 판매가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 제도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예를들어, 현재 미국에 승용차를 판매하고 있는 제조사가 약 40개가 있는데, 매년 그 제조사가 10개의 모델을 판매한다고하면 EPA가 담당해야할 차종의 개수는 400개에 이릅니다. EPA 혼자서 이 많은 차량을 직접 평가하고 확인할 수 있는 여력은 없습니다. 그러한 한계를 악용한 사례가 바로 지난 VW의 디젤 스캔들입니다. VW은 EPA 확인 평가 환경과 고객의 실도로 환경을 구분할 수 있는 불법 S/W를 장착하여, 확인 평가 환경에서만 배출가스 제어 장치를 정상 작동 시키는 트릭을 사용해 배출가스 규제를 위반한 것을 속이고 고객이 높은 출력과 연비를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해당 사건으로 EPA와 CARB 같은 규제 당국은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었고 모든 제조사의 인증 절차를 대폭 강화하기에 이릅니다. 

반면에 안전 법규를 담당하는 美교통부 산하 NHTSA(National Highway Traffic Safety Association)는 FMVSS(Federal Motor Vehicles Safety Standards)라는 연방 안전 규정의 만족을 요구하고 있으나, 당국의 최종 승인이나 인증장 발급이 이뤄지진 않고 기업이 스스로 법규를 만족했는지 확인하고 마무리되는 '자기인증' 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NHTSA는 어떤 기관인가?>

자동차 안전과 관련된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책 중에, "Unsafe at any speed : The Designed-In Danger of the American Automobile"이 있습니다. 유명 소비자 변호사인 랄프 네이더에 의해 1965년 쓰여진 책으로, 자동차 업계가 얼마나 안전에 무관심한지, 안전 증진에 투자하는 것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비판한 책입니다. 자동차 기업 뿐 아니라 타이어 제조사, 국가안전위원회, 미국자동차협회 등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상상의 실패'를 지적했습니다. "40mph의 속도로 달리다가 사고가 나면 모두 죽는 거이지 안전 벨트가 무슨 소용이 있어?"라는 마인드가 만연하여 안전 장치의 개발을 배척하고 있는 문화를 비판한 것입니다.

이에 자동차 업계는 즉각적인 반발을 했고, 1966년 당시 상원의원인 리비코프에 의해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이 청문회에서 랄프 네이더는 그동안 확보한 자료를 모두 공개하며 다시 한번 기업, 당국 그리고 전반적인 자동차 업계의 형편없는 Safety culture를 비판했습니다.

<Unsafe at any speed의 목차>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랄프 네이더>

 

이때만해도 안전은 소비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Unsafe at any speed의 내용도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인기는 GM에 의해 의도치 않게 급증하게 됩니다.

이 책의 첫번 째 챕터는 쉐보레의 Covair라는 차량의 결함 의혹을 담고 있었고 당시 이와 관련된 소송이 100건 이상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GM은 랄프 네이더의 활동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전직 FBI 요원을 사설 탐정으로 고용하여 그와 주변인들을 사찰했는데, 결국 이 사실이 알려져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의회를 포함한 전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책은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랄프 네이더의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되었습니다.

영화 같은 이야기인데요, 자동차 안전 법규를 다루는 NHTSA라는 규제 당국은 바로 이 때 생기게 됩니다. 자동차 선진국 미국에서 당시까지만해도 자동차 안전을 관리하는 제대로된 규제 당국이 없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죠. 실제로 위키피디아에서 NHTSA를 검색하면 '1.History' 섹션의 제일 첫 줄에 이 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In 1964 and 1966, public pressure grew in the United States to increase the safety of cars, culminating with the publishing of Unsafe at Any Speed, by Ralph Nader, an activist lawyer, and the report prepared by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entitled "Accidental Death and Disability: The Neglected Disease of Modern Society".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1965년 랄프 네이더의 Unsafe at any speed 출간

1967년 미국 교통부(US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설립

1970년 미국 교통부 산하 NHTSA 설립

그리고 1966년에 발의된 National Traffic and Motor Vehicle Safety 법령에 근거하여 NHTSA가 만든 법규가 바로 FMVSS라는 안전 규정입니다.

 

<NHTSA는 왜 자기인증 제도를 취하고 있는가?>

그럼 NHTSA는 왜 EPA나 CARB 같은 환경 법규 규제 당국과 달리 제조사에게 많은 부분을 맡기는 자기인증 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법규의 제정 절차가 복잡하고 속도가 느림(최소 2년에서 보통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림)

둘째, 안전 기술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빠름

셋째, FMVSS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 즉, 네거티브 규제에 해당

따라서 ,빠르게  발전하는 안전 기능을 일일이 법으로 규제하려고 한다면 법규 제정 속도가 기술 발전의 속도를 절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7년 전에 만들어진 자율주행 자동차 법규로 현재 수준의 자율주행 자동차를 규제하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NHTSA는 자동차라면 만족해야할 최소한의 조건들만 법규로 만들어 두고, 그것을 통해 규제하고 있지 않은 기술에 대해서는 기업이 스스로 판단하여 적용할 수 있는 자유도를 주는 네거티브 규제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NHTSA는 이러한 기조를 핵심으로 가지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테슬라의 오토파일럿이나 FSD 등에 대해 비판 세력의 목소리 만큼이나 제재를 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테슬라가 FMVSS에서 요구하는 자동차로서의 최소 법규를 모두 만족하고 있다면, 오토파일럿의 이슈는 NHTSA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워 집니다. 테슬라도 이 점을 굉장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리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규제 만족이라는 충분 조건 달성을 통해 자신들의 차별화된 기능을 마음껏 선보이고 있는 것이죠. 기존 기업들 입장에서는 억울한면도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의 혁신이라 생각해도 모두가 은연중에 만들어 놓은 컨센서스를 위반하는 것이라면 함부로 선보이지 못하는 문화가 있었지만 그것을 시원하게 깨고 나온 기업이 테슬라입니다. 이것이 옳다 나쁘다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지금은 가치 대결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결과가 말해줄 수 밖에요.